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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뭄의 아코디언 세계 여행

드디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고 출국일. 베트남 항공이라는 저가 항공을 이용했는데, 프랑스까지 가는데 꽤나 저렴한 가격이었다. 두근거리며 첫 해외 장거리 비행에 올랐다. 경유지에서 잠시 기다리다 베트남 항공으로 갈아타는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아코디언 무게가 무거우니 비행기내에 갖고 탈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영어는 안되고 설명은 해야하는데 그 때 주변에 아무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다는것이 제일 아찔했다. 바디 랭귀지로 겨우겨우 설명하며 사정을 얘기했는데 절대 안된다며 다른 방법을 알아보란 얘기만 하는 여승무원. 비행기 표를 하나 더 사서라도 갈 수 없겠냐고 사정 얘길 하는데, 한 남자 승무원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악기임을 확인하더니 별거 아니라는듯이 괜찮으니 같이 가지고 타라는것이 아닌가. 얼..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유학원을 통해 유학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영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와의 연락조차 쉽지않았기 때문이었다. 메일을 몇 번 보내도 연락이 없어서 답답하던차에 유학원을 통해 연락을 하자 바로 답변을 받았다. 지금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외국에 외국어로 직접 편지 한통 보낸다는걸 인생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때였다. 중요한 것은 아포스티유라는 프랑스어로 번역 된 공증서였는데, 준비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므로 미리 준비하는게 좋다. 그 외에 프랑스에 가는 이유와 다녀와서의 계획등에 대한 글도 불어로 작성해야 했다. 비자 준비하는데 인터뷰도 있다고해서 걱정이 많았고, 프랑스 대사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불편을 겪은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고..

중국에는 공원이 많았다. 그곳에서 물에 적신 커다란 붓을 가지고 바닥에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아쟁을 연주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단체로 에어로빅을 하거나, 기공 체조를 하는 풍경은 아주 흔했는데, 때로는 길 막하고 에어로빅하는 아주머니 부대에 놀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연을 날리거나 비눗방울을 부는 등, 여전히 순수한 놀이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도 신선했다. 공원에서 함께 무언가를 하는 모습들이 무척 보기좋았던것 같다. 뭔가 중국스러운 조형물 그들의 삶은 평온해보였고, 아무 문제없이 흘러가 보이는 듯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러나 중국에 머무는 기간이 길수록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갑갑함, 어딘지 모르게 폐쇄적인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정치 따위엔 관심없고, 그저 한 무리의 온순한 양 떼처럼 유유하..

가게를 그만두고, 개인적인 시간은 많았으나 마음의 여유는 정말이지 1도 없었다. 나 같은 쫄보가 해외 유학을 결심한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유학은 현실이었다. 하는 일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바빴다. 과연 잘한 일일까, 몇 번이나 머리를 뜯으며. 생각은 짧게, 실행은 빠르게를, 실천은 했지만 그 이후 다시 생각이 길어지고 있었다. 가게를 그만둔 때는 5월이었고 프랑스의 학교는 대부분 9월에 개강을 한다. 부모님은 일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중국에서 거주하고 계셨는데, 7년간 고생했다며 중국으로 동생 내외와 나를 초대해 주셨다. 그때만 해도 비행 경험이라곤 제주도가 전부였던 나에게, 그것은 몹시 설레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조금은 나를 위한 휴가도 주고 싶었고. 그러다 보면..

한창 일던 커피 붐이 꺼지면서, 대다수의 카페가 일주일에 한 집 꼴로 망해나가던 때였다. 손님이 점점 줄어 일거리도 사라지면서 몸이 편해지는가 싶더니, 결국, 7년 일한 가게로부터 영원히 편해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잘. 렸. 다. 위기는 기회라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당시 이미 서른 중반이었고, 조금이나마 주식해서 모아둔 돈으로 겁도 없이 고가의 아코디언을 질러버려 나의 통장은 몹시 가벼워져 있었다. 인생에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것 같던 시점이었다. 이쯤에서 나의 두 번째 아코디언과 인연이 닿은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차츰, 연습량이 늘어나면서 별생각 없이 샀던 첫 번째 아코디언의 바람통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악기 자체가 작다 보니 바람통을 자주 여닫아줘야 했고 그로 인해 ..

커피를 만들고, 한 시간 일찍 출근 해 가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다가 밤에는 피아노 학원을 빌려 아코디언을 연습했다. 그런 싸이클을 안정적으로 7년 정도 쉬지 않고 굴려왔던 것 같다. 처음으로 아코디언 동호회에서 연주를 했고, 매년 겨울이면 선생님은 제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만들어 우리는 한 곡 씩을 연주해야만 했다. 처음 무대에 혼자 섰을 때의 막막함이란.. 권투 링에 혼자 서본적은 없지만, 아마 그런 느낌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 싸울 수 없고, 내가 해야만 하는 싸움. 시작도 끝도 내가 해야만 하는 덩그랗고 커다란 무대. 나에게 첫 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무서워서 손이 덜덜 떨렸지만 어쨌든 정신없이 해냈었다. 때마침 기타를 연주하는 친구와 연이 닿아 나는 그동안 시도해 보고 싶었던 ..

땅고. 고등학교 때 왕가위의 춘광 사설을 극장 개봉판으로 봤더랬다. 19금 영화였는데 교복 입고 당당히 친구와 손잡고 들어간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후 지금까지도 춘광 사설은 내 인생 영화가 되었는데, 이 영화로 피아졸라와 땅고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줄곧 땅고를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었고 결국 여차저차 땅고 동호회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자랑스럽게 땅고를 배우겠다고 부모님에게 말했다가 그 날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었었다. 아버지도 젊을 때 춤을 배운 걸 안다. 그래서 더 나를 반대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옛날에 태어났으면 기생년이 되었을 거라고 했고, 홧김에 나는 한겨울에 반바지에 반팔티만 입고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다. 그런 나를 엄마가 쫓아 나와 설득했고 결국 나는 아버지 앞에 ..

우리 엄마는 두고두고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속이 답답할 때 그거라도 쾅쾅 두들기며 풀라는 맘으로 내게 피아노를 가르쳤다는 울 엄마. 8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처음 간 어느 아파트에서 나는 그렇게 피아노를 시작했다. 그 이후 음악은 정말이지 징글징글하게도 내 맘을 들었다 놨다 했다. 초등학교 때 관악부를 하겠다고 했지만 엄마의 반대로 좌절했고, 중고등학교 땐 부모님 몰래 지하실에서 헤드뱅을 하며 선배들 밑에서 메탈과 락을 배웠다. 사춘기 때의 난 짝사랑하던 선생님을 복도에서 마주치면 도망가기 바빴고, 얼굴 두꺼운 친구를 투입시켜 대신 요시키 누드 집을 사 오면 라면을 사주겠다며 구슬렸으며, 짜장면 집에도 전화 한 통 못 걸만큼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 ..